[정근식 칼럼] 2019년 시민적 평화운동의 현주소
2019.02.12. 15시02분 | 이수완 기자 아주경제

                   

[정근식 교수]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는 자유와 독립을 기념하는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을 굽어보는 언덕에 아주 작은 기념물 ‘발틱의 길’이 있다. 1989년에 만들어졌던 인간 띠 또는 인간 사슬을 기념하는 것으로, 사람의 발바닥을 형상화한 것이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자유광장,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의 대성당 앞 광장에도 이와 똑같은 기념물이 있다.

구(舊)소련 치하에 있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세 나라의 시민 200여만명은 이해 8월 23일 저녁 7시, 세 나라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손에 손을 맞잡고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세계에서 가장 긴 인간 사슬 또는 인간 띠였다. 시민들이 이루어낸 620㎞의 인간 띠는 약 45년간 지속된 소련의 ‘점령’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한 평화혁명의 원천이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 사회에서는 남북 공동 합창 등 여러 가지 이벤트를 구상했지만, 그중에서도 DMZ 인간 띠잇기 행사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준비되고 있는 행사에 속한다. 지난 1월 말에 DMZ평화인간띠운동본부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DMZ 민(民)+평화 손잡기 발대식' 기자회견을 열고, 판문점선언 1주년이 되는 오는 4월 27일 오후 2시 17분에 맞춰 비무장지대 근처에 있는 10여곳의 평화누리길에서 50만명이 평화를 염원하는 인간띠잇기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들이 발표한 선언문에 따르면 '3·1 선언 정신에 따라 이 땅과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이 행사를 준비하였고, 이를 통해 '지난 세월 분단의 상징이었던 DMZ를 평화와 생명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것이다.

이 이벤트가 ‘발틱의 길’로부터 얼마나 영감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유사한 시민적 평화운동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재의 시민적 역량으로는 강화도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비무장지대 동서 500㎞를 모두 연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좋은 장소를 골라 이벤트를 할 수밖에 없지만,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평화의 에너지가 상당하다.

필자는 지난 주말에 이 운동에 공감하고 있는 시민 50여명과 함께 강화도 북부 해안을 따라 걸으면서, 이런 인간 띠 운동의 의미와 함께 이것이 진정한 평화의 길로 이어질 수 있는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김포와 강화도의 북쪽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고 또 예성강이 합류한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한반도 수운의 중심 교통로였다. 한국전쟁 이후 이곳은 중립수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냉전은 조강 양안에 있었던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포구들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었다. 새롭게 해안 북로를 잇는 도로가 개설되고 있지만, 이 길을 따라 설치된 철책은 아직 삼엄한 경계의 눈으로 평화누리길을 걷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다.

이 길이 진정한 평화누리길이 되려면 관성화된 냉전적 안보의식과 무분별한 개발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장벽을 극복해야 한다. 작년에 남북은 군사회담을 통하여 비무장지대의 GP 일부를 철거하고, 한강하구 공동수로조사를 통하여 지도를 만들고 공유하는 수준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군사합의 자체를 부정하고 우려하는 예비역 장성들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고, 또 반대로 역사적 유산의 보존이라는 맥락에서 폭파 방식의 GP 철거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또한 우리 정부는 2030년까지 접경지역 개발을 위하여 225개 사업에 13조2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하였는데, 이 사업들이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개발 관성에 기초한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 사업들을 뜯어보면,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고 평화적 감수성을 높이기보다는 도로나 교량 건설과 개발 중심의 사업이 많기 때문이다. 조강에는 커다란 모래톱이 있는데, 남북이 이곳을 평화수역으로 지정하여 채취 개발한다면 한국 최대의 새우 산란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현지 주민의 우려가 생생하다.

평화문화와 평화산업은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있는 것이어서 좀더 많은 성찰과 토론이 필요하다. DMZ평화인간띠운동본부가 제안한 “꽃피는 봄날, DMZ로 소풍가자”는 다소 낭만적인 구호가 현실이 될지 아니면 한낱 꿈에 그칠지 알 수 없지만, 이 행사는 한국의 시민적 평화운동의 역량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2주 후로 다가온 하노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아마도 이에 후속하게 될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 여부가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alexlee@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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